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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왕이 된 남자>천민이 만들고 싶던 조선 역사 및 정보

by 아로스 애드센스 2023. 12. 19.

조선의 왕과 왕비와 도승지
영화 광해,왕이 된 남자 공식 포스터

영화 '광해,왕이 된 남자' 는 조선의 천민이 잠시 왕이 되는 스토리다. 왕의 대역이 된 그는 도승지의 명령을 거부한다. 그는 진짜 왕, 백성이 바라는 왕의 역할을 한다. 조선을 바꾸고 싶은 천민. 백성들을 위하는 왕. 과연 그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살펴보겠습니다.

'광해,왕이 된 남자' 천민이 만든 조선

혼란스럽고 간신들이 활보하는 조선 제15대 왕, 광해는 끊임없는 암살 위협을 피하기 위해, 그의 도승지 허균에게 자신의 대역을 찾으라고 명령한다. 광해는 독살당할 것을 계속 두려워했고, 기분이 불쾌해져서 부엌 하녀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위협한다. 허균은 광해가 궁궐을 비울 때마다 왕을 대신할 대역을 수소문한다. 수소문 끝에 왕을 빼닮은 천민 신분의 광대 일을 하는 하선을 발견한다. 며칠 지나지 않아 우려했던 대로 광해 왕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허균은 광해 왕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하선이 왕의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을 제안하고 하선은 왕처럼 보일 수 있도록 행동하게 한다. 첫 공식 석상에서 왕의 역할을 맡으면서, 하선은 그의 궁정에서 논의된 문제들의 복잡함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한다. 광해 왕보다 근본적으로 더 인도적인 존재인 하선의 애정과 극소수 신하들에 대한 고마움은 궁궐의 사기를 서서히 좋게 변화시킨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진정한 통찰력과 공정한 판단력으로 나라를 다스린다. 허균과 내시 대장까지도 하선의 백성들에 대한 진실한 관심에 감동하고, 그가 광해보다 한없이 뛰어난 통치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선은 심지어 왕비의 안전을 위해 싸우고 그녀와 그녀의 남동생을 사형선고로부터 보호한다. 그러나 그의 주요 반대파인 박충서는 왕의 행동이 갑자기 바뀐 것을 알아차리고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왕비 역시 하선이 진짜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다. 환관과 허균은 하선에게 영원히 조선에서 떠날 것을 요청한다. 기력을 되찾은 광해 왕은 반란을 응징하기 위해 다시 왕위에 오르고, 박충서를 비롯한 반대 세력을 응징한다. 하선이 부둣가로 향하던 도중 암살자들이 몰려왔고, 광해 왕의 호위무사가 목숨 바쳐 하선을 지킨다.

조선의 제15대 왕, 광해 왕의 정보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후궁 김공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본이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는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왕이 명나라의 국경으로 북쪽으로 달아났을 때, 그는 지청을 설치하고 방어전을 벌였다. 7년 전쟁(1592년 ~ 1598년) 동안, 그는 노쇠하고 약한 선조를 대신하여 조선 왕조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활동하면서, 전쟁을 지휘하고 파괴적인 전쟁 후에 국가의 재건을 책임졌다. 비록 그것이 그에게 위신을 가져다주었지만, 그의 지위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그에게는 형 임해 대군(임해군, 임해군, 임해군)과 동생 영창대군(영창대군, 임해군)이 있었는데, 영창대군은 소북파의 지지를 받았다. 광해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아들 영창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선조가 죽기 전에, 그는 광해 대군을 그의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로 임명하고 그의 조언자들에게 왕실 문서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소북파의 유영경은 문서를 숨기고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할 음모를 꾸몄으나, 대북파의 우두머리인 정인홍에게 들통났다. 유 씨는 즉시 처형되었고 영창대군은 체포되어 이듬해 사망했다. 그 사건 이후, 광해는 다양한 정치적, 지역적 배경을 가진 관리들을 궁궐로 불러들이려고 했지만, 그의 계획은 이이첨과 정인홍을 포함한 대북인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 후, 따르던 사람들은 다른 정파들, 특히 소노 던 사람들을 정부로부터 빼내기 시작했다. 1613년, 대북 군은 영창대군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조부 김제남은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되었고, 영창은 유배되었고, 그도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1618년, 영창의 어머니 인목왕후는 영창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다. 광해는 벼슬아치임에도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역사에 기록된 광해 왕

사후 그의 나쁜 평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능 있고 실용적인 정치인이었다. 그는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문서 복원을 후원했다. 재건의 일환으로, 그는 토지 조례를 개정하고 백성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했으며, 또한 여러 궁궐과 함께 창덕궁을 재건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오랜 불용 끝에 대동법을 재도입한 것도 그의 몫이었다. 외교 문제에서 그는 명나라와 만주 사이의 균형을 추구했다. 그는 조선이 만주 군사력과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명나라가 아직 명나라의 종주국일 때 만주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이는 명나라와 독단적인 유교 한국인들의 분노를 샀다. 만주 명나라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자 1619년 그는 명나라를 돕기 위해 만 명의 군사를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사흘 후, 전투는 만주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조선 장군 강홍립은 병력의 3분의 2를 잃고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다. 광해군은 만주족과 자주적으로 평화 협상을 벌였고, 간신히 또 다른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1609년 기유조약을 통해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하면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회복했고, 1617년 일본에 대사를 파견했다. 국내에서는 광해군이 대동법을 시행하여 신민들이 세금을 더 쉽게 납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법은 당시 가장 큰 곡창지대였던 경기도에서만 활성화되었고, 이 법이 전국으로 확대되기까지 1세기가 걸렸다. 그는 재건을 가속화하고 왕국의 이전 번영을 회복하기 위해 출판을 장려했다. 의서 동의보감 등 그의 치세 동안 많은 책이 쓰였고, 이 시기에 여러 역사 기록들이 다시 쓰였다. 1616년, 담배는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고 곧 한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습니다. 1623년 4월 11일, 광해군은 서구 세력에 의한 반란으로 폐위되었다. 김유가 지휘한 반란은 밤에 일어났고, 광해군은 도망쳤으나 나중에 붙잡혔다. 그는 처음에 강화도에 유폐되었다가 1641년 제주도에 유폐되었다. 그는 다른 조선 통치자들처럼 왕릉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와 류 여사의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의 비교적 초라한 곳에 안장되었다. 서양인들은 능양군을 인조의 16대 왕으로 추대하였고, 인조는 인조의 친명 반대 정책을 펼쳤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